세상이야기

일본一本 Japan, 은 어떤 나라인가?

dachshund-dream 2018.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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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一本 Japan,에 대해,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 

일본은 아시아 대륙 동쪽에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 4개 섬을 중심으로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일본 열도를 차지한 섬나라이다. 정확히는 동경 138° 00', 북위 36° 00'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계지도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일본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나라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대만 영토 분쟁으로, 항상 시끄러운 나라이기도 하다. 

(그림:  일본에 대해서 [일본 ⓒ dachshund-of-dream.tistory.com. 닥스훈트의 꿈 포토샵 , 수정: 닥스훈트의 꿈)



일본이란 어떤 나라일까? 일본에 대한 비판
한국사람들은 일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제대로 아는 것 같지만, 가깝기도 한 먼나라는 상투적인 소리를 빼놓고서라도 같은 동양문화권아래 어느 나라보다 대내외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어 온 사실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의 이해는 감정만 오고 갈 뿐이다.

단지 일방적인 감정이라고 볼수 없겠지만, 이것은 누구나 아는 것처럼 과거의 쓰라린 경험을 통한 역사적 반감일 수도 있고, 패전 후 50년도 채 안되서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의 경제력과 정신력에 대한 부러움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다시 국사대국화 되고, 있는 일본에 대한 일종의 불안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일본에 대해 한마디로 무지한 것은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땅에 남아 있는 일본의 많은 문화유산이 고대 한국인에 의해 전달되었거나, 한국인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졌다는 사실로 인한 우월감도 아니며, 오래전 부터 일본에게 당해왔다는 근대 이후 국력에 일본을 앞선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데에서 오는 열등의식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사실에, 바탕한 반성과 비판인 것이다. 

먼저 역사적 전범으로서 일본에 대해 간과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각각 유럽과 아시아에서 침략자, 점령자로서 평화에 대한, 인류에 대한 비인도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다가 독일과 일본은 다같이 패전국으로 전쟁의 종언을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두 국가는 다같이 패전의 잿더미 위에서 단시일내에 비약적인 경제 부흥의 기적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과거'에 대한 내면적인 태도에 있어서 전혀 상이한, 대조적인 두길을 걷고 있음을 알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독일이 과거에 대한 죄의식의 과잉 상태에서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면, 일본 사함들은 죄의식이 태무 상태로까지 이미 말짱하게 과거에서 해방되고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1985년을 전후해서 일본 현대사의 과거를 왜곡해서 편찬한 교과서 문제로 내외의 커다란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과거의 문제를 엎어둔 채 양 국민의 문화 교류와 상호 이해를 아무리 강조한들 이는 일시적인 이해 추구를 위한 기회주의적인 행동에 불구하다. 이러한 독일과 일본과의 관계는 과거에 대한 일본 그들식의 과거 청산은 가끔 뉴스를 통해 터져나오는 일본 정치지도자들의망언을 들을 때면 어욱 더 실감을 하게 만든다.  따라서 문제는 '과거'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를 어떻게 대처하고 어떻게 청산하고 어떻게 하려느냐 하는 '오늘 현재' 에 있다.  물론 청산되지 않는 과거의 가장 큰 책임은 가해자에게 있고, 청산되지 않는 가장 큰 원인은 히로시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픽:  전쟁의 최대 희생자가 된 [원자폭격ⓒ google.com. 원자폭격, 포토샵 , 수정: 닥스훈트의 꿈)

1945년 8월 일본에 투하된 미국의 원폭은 가해자인 일본을 전쟁의 최대 희생자로 만들어 버린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버렸다. 그로 인해 일본은 평화의 대변자로서 나아가서 히로시마는 전쟁이 남긴 역사적 고통의 실체로 일본인의 양심마저 마비시켜버렸다. 일제에 강제징용당해간 우리 민족의 억울한 피해를 생각할때 이러한 일본의 태도는 일본 군국주의에 침략당한 아시아 민족들로서 납득할 수도 용서될 수도 없는 것이다. 

원자폭탄 투하 이후, 히로시마는 최소 7만여 명이 그 자리에서 증발했다. 그리고 전체 도시 인구의 1/3이 직적적인 피해를 입었고 다른 주장에서는 20만이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비극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물질적 정신적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어떤 목적도 기대도 없이 전쟁의 대리 피해자가 되었던 우리민족과 원폭의 휴유증으로 고통받고서도 일본인과 같이 동일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동포를 생각 하면 답답함과 함께 피해자 쪽에서의 책임과 반성마저 느끼게 한다. 유럽에 보상을 받지 못하는 동포를 생각하면 명확히 구명되고 극복되는 데 반해 아시아에서는 이 처럼 과거가 왜곡되고 은혜되는 까닭은 피해자들의 책ㅇㅁ도 없지 않을 것이다.


과거 청산에 대한 일본의 모호한 입장과 회피에 앞서서, 우리 스스로는 과연 어느 정도 적극적인 노력을 해왔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이러한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구명을 위한 적극적 행동은 고대 문화에 있어서 이루어져야 될것 같다.

 

우리나라인 한국한계와 일본학계는 문화적 규정에 대해 종종 이견을 보여왔는데, 어떤 특정한 문화재를 두고 서로의 주장만을 고집하는 것이 현재에 있어 어떤 의미가 있는 가는 언뜻보아서는 별중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단지 두 나라 학계에서 계속 되풀이 되어온 상반된 주장일 뿐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문론 한국도 일본도 자신들이 이룩해놓은 문화에 중국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비약을 거듭해 발전해왔다. 여기에 한국은 한국다운 문화를 이룩했고, 일본은 일본다운 문화를 이룩했다. 그러나 일본 문화의 뿌리와 한국 문화의 관계에 있어, 그들의 터무니 없는 비약은 또 다른 역사의 왜곡이며 따라서 이 또한 역사의 진실을 구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사진:  백제 무령왕 [수천개 벽돌제작 ⓒ dachshund-of-dream.tistory.com. 백제 무령왕릉  포토샵 , 수정: 닥스훈트의 꿈)


여기서 우리는 고고학계에서 논란이 된 일본의 국보 스다하치만 신사소장 인물화경의 명문을 통한 백제무녕왕과 일본 왜왕, 케이타이 천황의 관계를 재 해석 할 필요를 느낀다. 스다하치만경은 역사적으로 한일 고대사에 있어 중대한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이 스다하치만경 명문의 판독에 있어서 경의 제작자와 수령할 상대의 판독은 양국 학계에서 많은 의견 차이를 보고 있다. 이 명문에서 중요시 되는 것은 대왕년과 남제왕 그리고 사마와 관련된 문구의 해석에 있다.


(캡처:  KBS 역사 인물화상경[역사] ⓒ www.kbs.co.kr. 인물화상경 포토샵 , 수정: 닥스훈트의 꿈


 스다하치만경 명문을 정당하게 해석하려면 먼저 계미년의 연대가 확인 되어야 하며 연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사마와 남제왕의 정체가 밝혀져야 만 한다. 그러나 명문을 해석하는 일본학계 인사의 태도는 한결같이 자국 중심사상에 빠져 정확한 문화재의 구명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일본학계의 다수설이며 또한 유력한 설로 인정받고 있는 후쿠야마의 해석법은 사마를 단순처리 하여 남제왕의 신하로 격하시켰으며, 이미 타계한 닌켄천황을 등장시켜 대왕년의 주인공으로 추대하는 초명문화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더욱이 스다하치만경을 가치고 그것은 사마가 남제왕에게 헌상한 공물이라고 보는 일본학계의 시각은 황국사관에 바탕한 반역사적인 해석이다.


(캡처:  KBS 사마, 남제왕[역사] ⓒ www.kbs.co.kr. 인물화상경 포토샵 , 수정: 닥스훈트의 꿈


명문의 정확한 해석을 위해서는 남제왕의 실체와 함께 사마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도 보다 중요하다. 이에 1971년 우연히 발굴된 송산리 고분의 지적은 대왕년, 계미년의 실체와 함께 사마의 정체를 확인해준다. 결국 스다하치만경은 사마가 남제왕에게 주기위해 개중비직을 시켜 만든 수많은 백동경 중의 하나이며, 하내비직과 남제왕 두사람은 다 같이 국조의 세를 다투는 실제로써 사마를 상왕으로 모시는 입장으로 사마에 있어 남제왕은 그가 신임하는 제왕이며, 예인 하내비직은 그가 아끼는 그의 대역과 같은 인물일 것이다. 따라서 명문이 시사하는 중량을 토대로 추정할때 계미년 8월에 사마가 그의 제왕에게 '하사' 하기 위해 만든 절묘한 인물화상경은 중앙집권적인 정치세력의 통제수단으로서 수장권 승계의 외적 승인을 뜻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당대의 경은 오늘날의 임명장이나 신임장과 같다고 볼수 있다.


사마하는 임오년 백제 땅 웅진에서 백제왕국 제 25대왕으로 즉위하였으나 계미년은 그가 등극한지 바로 다음해의 일로써 그는 자신의 즉위를 제왕인 남제왕과 그의 신하들에게 알리고 그들에 대한 변함없는 신의를 다지는 뜻에서 백동경 다수를 만들어 남제왕에게 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와 같은 확실한 명문을 가지고 일본의 명문 해석자들은 정당한 해석을 기피하고 황국사관에 빠져 사실을 은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왜곡 가능성은 일본인들이 중국의 사기에 버금가는 일본최고의 정서로 꼽는 일본서기에서도 볼수 있다. 일본서기는 그 연대가 불확실하고, 또한 그 작성자가 누구인가를 잘 모르는 모호한 것으로서 더 큰 문제는 조직적으로 자행된 조작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서기 720년에 성립되었다고 하는? 일본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으로 알려진? 일본 서기는 실존하지도 않은 가공의 진무천왕을 제 1대 기원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대화의 천황들은 1300년이 넘은 긴 세월을 대를 이어가면서, 대화 8주를 통치하고 나아가서는 바다를 건너 한번도까지 진출하여, 그곳의 여러나라들을 '복수'하였고 하는 이른바 '신공기'는 일본서기의 핵심으로 어느누구도 납득할수 없는 그들만의 역사가 아닐까 한다. 


신구우의 심한정벌은 서기 편자들이 나당 연합군에 의해 무너진 백제와 고구려를 대신해 한반도에 새로 등장한 신라를 염두에 두고 꾸며낸 조작일 뿐이며, 동시에 그들의 오래된 종국인 백제의 멍에를 벗어나 백제를 일본의 신속국으로 전락시키기 위한 그들만의 더 큰 의의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백제와 왜의 교류와 교환의 왕래를 백제가 왜에 헌 공 조 한것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때로는 왜가 백제에 '사'한 것으로 표기하는 등 일본을 주제로 한 일방적인 표기로 일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칠지도의 경는 이것이 분명 백제왕이 일본, 왜 에 있는 자신의 후왕에게 하사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진구우기 52년 9월조는 이것을 백제 초고왕이 진구우에게 헌상한 것으로 주장하고, 나아가 백제왕이 매년 조공을 올리겠다는 명세를 했다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 상대의 경과 검은 신기로서 신임부여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언제나 위로 부터 '하사' 되는 것이지 '헌상'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지 알수 있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왜왕인 천황의 몰년을 '붕'으로, 같은 시대 백제왕에 대해서는 '훙'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상대의 신분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기로써 붕으로 표기 되어 있는 왜왕인 천황은 그의 생전에 백제왕을 후왕으로 가진 대왕이라는 것으로 백제가 일본국의 신속국이라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백제왕이 천황의 후왕 노릇을 하였다고 하는 일본서기의 주장은 다른 사료에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며, 이는 다만 서기 편찬자들에 의한 조작인 것이다. 위 내용에서 언급된 것처럼 고서를 통한 역사가 들의 사실의 고증외에도 나는 식민지시대 한국인의 종속성과 피지배성의 강조를 통해 한국인의 사고 영역과 의식 구조를 마비시킨 일본에 대해 더한 분노를 느낀다. 반도의 지리적 특성의 역작용만을 끄집어내어 그들의 식민통치이념에 맞추어 체계화한 이른바 반도민의 종속성 논리가, 일제가 패망한 지 반세기에 이르는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뇌리속에 끈질게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진: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 read01.com. 광개토대왕릉비, 포토샵 , 수정: 닥스훈트의 꿈)


그들은 조선의 역사를 중국에 의한 종속의 역사로 보고, 한국은 역사의 시작에서 이민족의 지배를 감내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닌 듯이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역사시간에 들어 온 임나일 본부에 관한 일본의 주장도 고대사에서 열등감을 만회하기 위한 수단이 아닐까? 임나 일본부의 근거나 되고 있는 광개토 대왕 비문은 고대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자료로 활용되기 보다는, 일본 사학이 보여주듯이 역사를 왜곡하는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판독이 불가능한 비석의 훼손된 부분에 대해서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의도적 훼손의 의혹을 불러 일으킨다. 광개토 대오아 비문의 해석을 통한 임나 일본부에 대한 일본사학의 주장은 상상이상으로 집요하다. 여기서 분명히 짚어두어야 할 일이 있다면 양국 사학의 견해가 서로 다르다고 하여, 국민 감정에 편승해서 우리에게 유일한 내용들만 취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식적이고 원론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볼때 광개토 대왕비는 장수왕이 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전승 기념비이며 따라서 비문의 내용은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고려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내용들로 작식되어 있다 토여주듯이 역사를 왜곡하는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판독이 불가능한 비석의 훼손된 부분에 대해서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핸 의도적 훼손의 의혹을 불러 일으킨다. 광개토 대왕 비문의 해석을 통한 임나 일본에 대한 일본사학의 주장은 상상 이상으로 집요하다. 여기서 분명히 짚어 두어야 할 일이 있다면, 양국 사학의 견해가 서로 다르다고 하여 국민 감정에 편승해서 우리에게 유일한 내용들만을 취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극히 상식적이고 원론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볼때 광개토 대왕비는 장수왕이 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전승 기념비이며 따라서 비문의 내용은 광개토 대왕이 이끄는 고려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내용들로 장식되어 있다. 일본사학의 주장처럼 왜의 승리를 기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종합해 볼면, 한국과 일본의 고대 문명이 중국을 모태로 발전해 왔다고 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로 이견의 여지가 없으리라 본다. 


고대 사회의 문화 수준이란 금속기의 사용과 농경문화로 단순화해 볼때 중국 물질 문명을 가까이 접하고 있던 우리나라야 말로 이런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고 정착시키는 데 보다 유리하다. 일본의 경우 바다라는 차단막으로 인해 중국과 격리되었으며, 이동 능력이 취약했던 당시 중국이 위험을 감수하고 일본에 진출했다는 가설을 설득력을 잃는다. 결국 일본 고대 문화의 뿌리가 한국에 의해 전수되고, 그 바탕이 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역사상으로도 중요한 일이다. 

앞서 논의된 것처럼 왜곡된 역사는 객관적 사료에 위해 반드시 규명되어야 한다. 역사적 진실이 규명 되는 것은 그 사실로도 중요하지만 나아가 민족문화와 정신의 함양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일본에게 문화적 해택을 일방적으로 전수했다. 하더라도 이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일 뿐이다. 과거는 과거로써 규명되어야 하며 역사가 가지는 가치는 과거의 진실 그 자체에 있다. 현재는 현재로써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 어느나라도 일본의 역량을 무시 할 수 없으며, 이런 상황이 역사와 문화의 왜곡에 있어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닐까? 현재와 결부시키지 않더라도 조선시대에서 근대에 걸쳐서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는 어떠한가?


(지도:  일본에 식민지 국가 [일감정기ⓒ historyplace.com. 식민지 국가, 포토샵 , 수정: 닥스훈트의 꿈)


한마디로 일본의 경제적 군사적 침략에 따른 대응의 역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청일전쟁과 러일 전쟁은 한반도 지배를 둘러싸고 벌어진 우리의 의사와는 무관한, 강대국의 각축전이다. 이 두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제국은 강화도 조약에 의해 청러 양국으로 부터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정식으로 얻었다.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일본의 침략을 두려워 하여 일본과 가쓰라 태프트 협약을 비밀리에 체결하여 일본이 필리핀을 침공하지 않는 약속의 대가로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지배를 묵인키로 하였다. 러시아 제국의 남하정책으로 식민지 인도에 대한 침략을 우려한 영국도 영일 군사동맹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지배를 조약으로 승인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강대국의 공인하에 의기양양하게 한국에 대한 침략을 강행하였다. 결국 1910년 한국은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강제 합병 하였던 것이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군사적 필요에 따른 영토 침략이라고 볼수 없다. 일본 식민지 정부는 한국의 근대화 개발과 일본문화의 이식이란 양면적 식민지 정책을 내세우며 한국을 지배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정책은 우리민족에게 반일 감정에 따른 격력한 저항을 가져 오게 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근대화가 자국의 이해에 의한 것이었지만, 상대적으로 근대화는 서구화의 과정으로 수용되었기 때문에 별 저항이 느껴지지 않았으나 일본문화 이식의 경우는 상당한 거부감에 따른 반발을 사야했다.


(그림:  황국신민화 정책 [일감정기ⓒ google.com. 황국신민화 정책, 포토샵 , 수정: 닥스훈트의 꿈)


황국신민화 정책에 의한 일본문화의 강제 유입은 고대에서 전해내려 온 우리의 전통 문화와 정신문화에 커다란 훼손을 가져왔다. 현재에 이르기 까지, 일본문화의 잔재는 알게 모르게 우리 문화인 양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일본의 침략성과 기회주의적인 성향은 제 1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에 가담하여 단지 명목상 전승국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이익을 취하게 하였다. 그 결과 일본은 세계 5대 강국의 하나가 되고 국제연맹의 상임이 사국이 되었다.


1930년대 이후 일본은 국사대국화되고 세계 열강들과 아시아 대륙지배를 위한 패권 다툼에 돌입했다. 세계 대공항시절 세계 열강이 그 수숩에 여념이 없는 사이 일본은 중국 동북부 만주를 전격으로 침략하고 괴뢰정권을 수립하였다. 이 침략행위로 인해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국제적인 고립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일본군부는 중국대륙에 대한 노골적인 도발 침략행위를 감행, 중일 전쟁을 일으켰다. 그 이후 제 2차 세계대전에 발발하고 일본은 동남아시아 까지 침범하기 시작했다. 결국 태평양 전쟁의 패배후 무조건 항복으로 철저한 패전국이 되엇다. 그러나 이러한 패전 일본이 오늘날의 세계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고 다시 군사대국화 되었다.


일본은 도약과 발전의 괴회를 포착하여, 전 후 패전국의 고통을 말끔이 씻었다. 확실히 많은 일본인들이 과거 그들의 군국주의적 팽창정책과 아시아 이웃나라에 대한 무자비한 식민통치를 정당했던것 혹은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또 현재 일본이 경제논리만을 앞세운 국제관계를 추구하고, 군사대국화의 길을 걷고 있다는 시각도 반드시 틀렸다고만은 할수 없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비판만이 최우선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대응해 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면 현재의 일본은 어떠한가? 우리는 얼핏 보기에 상반되는 두가 일본인론을 가지고 있다 간단히 보면 외관상 드러나는 경제대국으로 선진국이 되기 위한 표본으로써의 일본과 또는 내부에 서 일어나는 사회적 모순에 의한 일그러져가는 일본으로 표현 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경제적 동물로 불리기 자청하던 일본이 이제는 비록 일부 지식인들에게 국한되기는 하지만, 그들마저 자신들만의 특수한 민족성에 대해 극단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외국으로부터 풍요해졌다고 여겨질 뿐만 아니라

일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믿는 오늘의 일본사회에서 특히 대도시와 그 주변에 살고 있는 이른바 도시빈민은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노상 생활자 또는 노숙자에 대한 일반국민들의 반응은 철두철미하게 차별을 넘어 배제의 자제이다. 이와 같은 풍조를 여실히 반영하는 노숙자습격사건은 분명 일본사회 전체의 풍조를 대표하고 있다.

루스 베내딕트 여사의 생각처럼 일본은 상반된 양면을 가진 민족일지도 모른다. 하나의 예의 바르고 평화적인 '국화'같은 존재의 일본이고, 또하나는 야만스럽고 고전적인 '칼'과 같은 일본이다. 


(책 사진:  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지음  [국화와 칼ⓒ www.eulyoo.co.kr. 을유문화사 정책, 포토샵 , 수정: 닥스훈트의 꿈)


국화와 칼에서 베네딕트 여사는 이처럼 전혀 상반된 가치관이 공존하는 일본인의 지식구조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려 했다. 그들의 특수한 민족성은 일본의 아시아 침략이 가중되던 떄 정책수단의 일부로 집단 윤리를 강조하던 데에서도 볼수 있다. 특히 천황에 대한 무조건 적 충성은 대동아 전쟁말기 젊은이 들에게 '가미가제' 돌격대에 참가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을 열광으로 알게 길들였다. 이런 충군애국적 자살은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크게 칭송되었고 강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목숨을 바친다는 것이 전쟁시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었다기보다는 사회적 미풍으로 오랜 전통과 역사가 배경에 있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현대에 있어 일본인들에 의한 지난날의 비판이 많이 변화되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날 일본 비판은 전쟁전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한 진 보적인 문화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지만, 최근에는 반 좌익 보수진영을 중심으로 일본의 경제 대국화를 배경으로 한 어떤 의미로는 일본 대국론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최근의 동향을 볼때 또 다시 전쟁전의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는 다고 보장 할 수 없다. 아직도 일본정부는 전쟁책임과 전 후 책임을 이행하지 않고 있으며 우리에 대해 식민지 지배에 대한 공식적인 사죄도 하지 않고 있다. 70만명이나 되는 재일 한국인에 대해 외국인 등록법 지문날인을 강요하여 범죄인처럼 다루고 있다. 강제연행된 사람들의 명부도 밝히지 않았으며 여자 정신대라는 이름 아래 종군위안부로 끌려간 사실도 장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PKO 법안 의 통과로 자위대의 해외 파병이 가능화된 지금 우리에게는 큰 부담이 아닐수 없다. 

일본은 진정한 의미의 대국이 되고자 한다면 확대주의 적인 길로 나갈 것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더욱 작고, 높고, 아름다워지라고 호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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