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김구(김창수) 선생님의 일대기,독립운동가

김구(金九, 1876829(음력 711)~1949626)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정치인

1927년부터 1933년까지, 1940년부터 1948815일까지 제6, 8, 10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과 주석

2009년 상반기 중 발행될 고액권 10만원권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다.

 



성장 및 활동

동학운동(1893~1895)참가

 

18931월초, 그는 포동의 동학교도 오응선(吳膺善)을 찾아가 동학(천도교)에 입도

18세의 나이로 수백명의 수하를 거느리는 팔봉 접주로 임명

 

1894년 가을 해월 최시형을 찾아가는 대표자로 선발되어 연비 명단 보고차 보은에 가서 접주 첩지를 받아왔다. 같은해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을 지휘

 

1895(19),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의려소(義旅所)를 설립

18952월부터 안태훈(안중근의 부친)의 배려로 안태훈의 신천군 청계동 산채에 몸을 의탁

 

국모보수사건(1895~1899)

21세였던 18962월 청나라로 향했다가 을미사변의 공범이라 의심받아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라는 일본 육군 중위 살해

김구는 살인 이유로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자신의 거처를 적은 포고문을 길거리 벽에 붙이고 집으로 돌아가 체포되기를 기다렸다.

 

189611월 체포 해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감되어 인천으로 압송

이어 11월 법부에서 김창수의 교수형 건의로 강도살인죄로 사형선고를 받으나, 고종은 판결을 보류하였다. 당시 국민들의 반일감정과 명성황후에 대한 원수를 갚아야한다는 "국모보수"(國母報讐)의 민심을 의식한 조선 법부는 고종 황제의 형집행 보류지시를 근거로 사형집행예정일 하루전날 형 집행을 보류

 

교육계몽운동(1900~1918)

1900년 지인을 찾아 내려갔던 강화도에서 3개월간 훈장일을 한 것을 계기로, 고향인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및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

 

1905년에는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

1907년에는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황해도 총감으로 활동

1911년 안악사건, 105인 사건 등으로 연루, 체포되어 이에 종신형 선고 받고 수감되었다.

 

상해 임시정부 활동(1919~1926)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당수로 하여 조직된 신한청년당에 간여하였다.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3·1운동 직후 임정에 개입

 

임시정부 국무령·국무위원 취임(1926~1929)

19246월 내무총장으로 노동국총판을 겸임

 

광복군 조직 활동(1930~1939)

193412월 난징에서 중앙군관학교 소속 한인 학생을 중심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을 조직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1940~1945)

 

광복초기 정치활동(1945~1946)

19454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였고,

194511월 상하이를 거쳐 임시정부 환국 제1진으로 귀국

194593일 임정 국무회의 명의로 발표된 ‘당면정책 14개조’를 발표

 

신탁통치반대운동과 임정 법통(1946~1947)

19462월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고 의장에 선출

1947년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471124일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

19471130일 이화장의 이승만을 방문하여 한시간을 회동, 자신과 이승만의 근본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하였다고 발표

 

만년(1949)

1949626, 1236,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안두희가 한국전쟁 이후 사면을 받고 군납업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같은해 7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저서로 《백범일지》《도왜실기》 등이 있다. 별세 당시 김구의 나이는 만 74세였다.

 

백범 김구선생님이 서거하기 3개월 전 동료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남긴 친필휘호 광명정대(光明正大) 


문화재청은 김구가 1949년 쓴 광명정대 글씨를 독립운동가 김형진(1861~1898)의 후손으로 부터 기능받아 2018년 8월 5일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인도했다. 


김형진님은 1985년 김구 선생님과 함께 무력으로 일제를 결퇴할 것을 결의하고, 중국 선양에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동행한 인물이고 독립운동가 이다. 1896년에는 의병 활동도 하였다. 1898년 동학의 접주 동학 교단 조직인 접의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일제의 체포되어 고문끝에 생을 마감하셨다. 1990년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평가와 비판

1999년 한겨레21이 실시한 '20세기 정신사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 설문조사에서 백범은 가장 많은 사람이 꼽은 인물이었다. "사상가라기보다 정치지도자에 가까운 백범은 역사 속에서 민족자주를 위한 실천을 치열하게 전개한 점에서, 많은 응답자들로부터 한국 민족주의의 정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견해 중 이념을 내세워 분열시키는 냉전세력의 비판과 함께 민족통합을 통한 완전독립국가의 모색과 함께 민족과 인류의 현실의 진리는 문화국가를 추진한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유튜브=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김구, 1부 나의 길 KB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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